[人스토리] 후쿠오카대 이명철 교수 "노력하는 사람이라도 즐기는 사람은 따라갈 수 없다"

박영만 / 기사승인 : 2019-02-14 1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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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인터뷰]
▲  일본 후쿠오카대학 이명철 교수
[일요주간 = 박영만 기자] 일본 도쿄대학 공학부에서 계측수리공학과(计测数理工学)를 전공하고 석박사학위를 받은 이명철(70년생, 랴오닝성 무순) 교수가 29세 나이에 후쿠오카(福冈)대학에 강사로 초빙되어 3년 만에 부교수, 다시 5년 후인 37세 때에 교수로 승진해 많은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다.

이 교수는 현재 딸과 함께 일본에 생활하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딸애는 올해 17세로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고 있으며 한국어도 알아듣는다. 일본에서 미국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애는 올 여름방학에 미국 보스턴MIT(麻绳理工学院)에서 주최한 창업 여름캠프에 추천되었다.

이 교수의 부인은 일본의 대형 체인점회사 중국지사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독립하여 옌타이시에 직통가 (直通家)슈퍼를 운영하고 있는데 벌써 체인점 15개로 늘어났다.

아버지인 이춘식 교수는 옌타이대학 기전자동차공정학원의 창시자이며 어머니 김송학 원장은 옌타이대학 외국어학원 한국어학과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부모와 부인이 살고 있는 옌타이에 해마다 3번 정도 온다는 이명철 교수를 기자가 최근에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첫 인상에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이명철 교수는 평소에 골프, 낚시, 테니스, 스키 등 운동을 즐긴다고 한다.

이 교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학습이나, 전업, 직장 선택에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꿈과 목표를 즐겨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월반(跳级)하던 소학교와 유급하던 중학교 시절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이 교수는 공부를 잘하여 소학교시절 2개 학급을 월반(跳级)하였으며, 랴오닝 이석재(李石寨)조선족중학교 2학년 시절엔 아버지인 이춘식 교수가 화중공학원(현재 화중과학기술대학)에서 연구생공부를 하게 되면서 아버지를 따라 우한으로 전학가게 되었다. 동북에 있을 때는 조선족학교에 다녀 일본어만 배웠는데 우한에서 중국학교에 들어가면서 영어를 배워야 했기에 처음에 어려움이 너무 많아 한개 학급을 유급하기도 하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고 철이 일찍 들었던 이 교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안정을 찾으면서 1987년에 화중과학기술대학 관리정보계통학과 (MIS)에 무난히 입학하게 되었다.

 석박사 5년간 줄곧 장학금 받아

1991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계획했지만 당시 중미관계가 좋지 않아 포기했다. 마침 아버지가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할 때 많은 도움을 준 지도교수가 중국을 방문 중 이 사정을 알게 되면서 일본 유학을 권장하였다. 자신이 담보인으로 나서고 연수생과정을 지도할 교수까지 소개해주겠다고 나섰다.

일본에서 대학원에 입학하려면 먼저 지도교수를 찾아 2년간 연수생과정을 거친 후 연구생 입학시험을 쳐야 된다. 이 교수는 중학교 2학년까지 배운 일본어 밑천으로 시작하여 반년후에 연구생 시험에 도전, 도쿄대학 공학부 계측수리공학과에 무난히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 교수는 일본어가 능숙하지 못했지만 도쿄대학에서는 외국인에게 영어와 일본어로 된 시험지를 출제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여 94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97년에 박사학위를 따안았다.

당시 일본에는 조선족유학생들이 적지 않았는데 중국과 일본과의 수입 격차가 많다보니 대부분 유학생들이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와 저녁에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버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성적이 안좋아 국립대학에 못가고 학비를 자부담하는 사립대학에 붙는 경우가 많아 알바를 해 학비를 대는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교수는 공립대학에서 5년동안 줄곧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학교에서 성적도 좋다보니 입소문이 나면서 가정교사를 하게 되어 생활비도 저절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늘의 별따기였던 대학교수 직장

박사를 나오고 옌타이로 돌아와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고 곧바로 다시 도쿄로 향했다. 란저우대학을 나온 부인이 도쿄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연수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대학교 교수 생활이 꿈이고 목표였던 이 교수는 도쿄에서 대학을 수소문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아 별수 없이 국제디지텔통신회사에 취직했다. 이 교수는 졸업 후에도 도쿄대학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국제학회도 참가하고 있었으며 우선 전공이 그 회사와 맞아떨어졌고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4개 언어를 능란하게 구사하였기에 회사에 몇년만 근무하는 조건으로 입사한 것이다.

회사에서 아시아지역 코디네이터(主管协调)를 담당하던 이 교수는 2년 후 사직하고 후쿠오카대학에서 강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원서를 접수시켰다. 수십명 박사들과 경쟁하여 29세 나이에 후쿠오카대학 경제학과의 강사로 채용되었다. 이어 37세에 교수로 승진되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장인정신과 장인문화를 배워야

이 교수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우선 자신이 즐겨야 성공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즐기면 열정이 생기고 끈기도 있게 된다고 한다.

이 교수는 대학교에서 굵직굵직한 논문들을 많이 펴내면서 지금까지 20여 개 나라에서 진행되는 학술회의나 국제회의에 참석해왔다.

지금까지 두번 안식년(带薪度假)휴가를 받았는데 2005년에 뉴욕주립대학에서 1년간 있었으며 2016년에는 워싱턴 죠지메이션대학에서 1년간 있었다. 안식년 기간은 본인이 필요한 과제를 연구하면서 편안하게 휴가를 즐긴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일본에는 100년 넘는 기업이 5만 여 개가 있지만 중국에는 10여 개 밖에 없다는 통계가 있다면서 일본사람들은 총명에 앞서 일을 즐길 줄 안다고 강조한다. 그 즐김이 장인정신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평생 한가지 일만 하는 장인문화를 고착시켰다고 설명했다.

현재 란저우철도학원 객원교수, 옌타이대학교 명예교수직도 맡고 있는 이 교수는 매년 중국과 학술교류를 자주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기존 교류외에 국내 다른 대학과의 교류를 통해 우수한 학생을 많이 이끌어주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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